예수 옷자락을 잡다

제 어머니는 올해 아흔 하나이십니다.

3대 독자 아들을 위해 지금도 새벽기도를 거르지 않으십니다.

어머니의 눈물 어린 기도의 제목이 무엇인지 알기에 더 늦기 전에 어머니께 제가 답을 드려야 했습니다.

저는 믿음이 무엇인지 구원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어머니의 기도가 오늘의 나를 있게 했습니다.

이 책은 소설입니다.

소설은 기본적으로 상상을 바탕으로 쓰여지기에 제 글에 “걸려 넘어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 글을 쓰는 내내 주(主)의 음성이 들리는 듯 했습니다.

“여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도다.”

이 책을 어머니께 바칩니다.

저자의 말

나 어릴 적, 조선에서 태어난 한() 많은 어머니는 예배당에 엎드려 흘린 눈물이 자신의 옷자락을 적시고 마룻바닥을 적셨다. 지금 당신의 눈물은, 자는 듯 주님의 품안에 데려가 달라는 기도보다 아들의 불신앙(不信仰)에 대한 것일 게다. 어쩌면 나는 어머니의 소원(기도)을 들어드리지 못할 것 같다. 이것은 내 실존(實存)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나는 믿음이 무엇인지 구원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어머니의 눈물어린 기도는 오늘의 나를 있게 했다. 필자도 어릴 적 예배당에 다녔다. 성경공부를 하며 숱한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지만 그 끝은 언제나 나의 믿음의 부족으로 귀결되었다. 무조건 믿어라.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것이 믿음이다.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의 표징(表徵)이니까.

나는 교회 밖에서 답을 찾고자 했다. 무교회주의에 기웃거렸고 성공회 수도원이던 <예수원>에 머물기도 했다. 그러나 그 어디에도 내가 찾는 답은 없었다. 아니 나는 답을 찾고자 한 것이 아니라 떠날 구실을 찾았다는 것이 옳다. 찾는 것이 없으니 구할 것도 없다. 그렇게 나는 내 의지대로 교회로부터 자유로워졌다. 그렇게 무심한 세월이 흘러 필자가 장년이 된 어느 날 내 가슴 깊은 곳에서 모락모락 피어나는 것이 있었다.

....”

인류 역사상 그이보다 더 전 세계인의 입에 오르내리고 회자(回刺)되는 인물은 그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을 것이다. 예수는 곧 신약성서다. 신약성서는 젊은 시절 내 방황의 근원이다. 예수의 이적(異跡). 나는 이 부분에서 한 발짝도 나갈 수 없었다. 성서에는 병이 나았다는 이적이 수없이 등장하는데, 병이 나았다는 것이 어떤 의미일까? 혹 그 말이, 육신의 병보다 그 병으로 인해 가족과 마을로부터 격리되어 처절한 외로움 속에 살아가던 그들이 예수를 만나 위로를 받았다는 것은 아닐까? 따라서 병이 나았다는 말이 혹 구원(救援, salvation) 받았다는 말은 아닐까? 이 구원이란 깨달음 즉 앎 아니었을까? 앎이란 무엇일까? 진리일까? 그것은 혹 자신이 천하보다 귀한 존재라는 자각(自覺) 아니었을까?

<예수 옷자락을 잡다>는 소설이다. ‘신약 역사소설이거나 신약 실명소설이라고 해도 좋다. 따라서 이 책은 작가의 상상을 바탕으로 예수의 이적을 필자 나름의 해석을 소설이라는 형식을 빌려 쓰였다. 이 책을 쓰는 내내 나를 괴롭힌 것은 창작의 고통이 아니라 자기검열이었다. 소위 표현의 수위(水位)를 조절하는 것이다. 때론 당연했고 때론 화가 났고 때론 타협했다. <예수 옷자락을 잡다>는 이렇게 쓰였다. 이 책을 아직도 새벽기도를 거르지 않는 구순(九旬)의 어머니께 바친다. 이 글을 쓰는 내내 주()의 음성이 들리는 듯 했다.

여인아! 너의 믿음이 너를 구원했도다.”

차 례

예수는 목수였다

예수 옷자락을 잡다

누가 네 이웃이냐?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새벽, 닭이 울다

여인아 여인아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어라

네 은혜가 그것으로 족하다

줄거리

예수는 목수였다

성서에 예수의 어릴 적 기록이 단 한 곳(루가 2.41~52)에 언급된다. 어쩌면 성서의 기자(記者)들은 인간 예수보다는 주()로서의 예수에 더 방점을 찍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어느 날 하늘에서 구름타고 이스라엘에 오지 않았다. 베들레헴 마구간에서 태어나 30년을 요셉과 마리아의 아들로 살았다. 목수인 아버지 요셉을 따라 목수가 되었지만, 아버지를 일찍 여위고 어머니와 여러 동생들과 15년여를 살며 결혼 적령기를 훌쩍 넘겼다. 예수의 얼굴은 한없이 인자했으나 그의 눈은 더 깊어졌다. 예수는 3년이라는 짧은 공생애(公生涯)을 살았지만 그 삶을 살기 위해 30년을 준비한 것으로 봐야 한다

 

예수 옷자락을 잡다

한 여인이 있다. 그녀는 혈루증을 열두 해 째 앓고 있었다. 병을 낫고자 가산을 탕진하고 나락(那落)으로 떨어졌다. 삶의 희망이라곤 한 뼘도 없는 절망의 나날 속에서 예수의 소문을 듣는다. 처음으로 가슴이 뛰었다. 그리고 병든 몸으로 길을 나섰다. 예수 옷자락만 잡으면 병이 나을 거라는 믿음 하나로. 그리고 예수 옷자락을 잡았다. 한 눈에 여인의 슬픔을 알아본 예수는 당신의 믿음이 당신을 구원했소. 평안히 가시오.” 하셨다. 이 여인이 베로니카다. 예수가 십자가에 지고 골고타을 오를 때 피 묻은 예수의 얼굴을 닦아줬던 그 여인이다. 그 손수건에 예수의 얼굴이 아로새겨져 성화의 모티브가 되었다.

누가 네 이웃이냐

강도당한 사람을 제사장도 레위사람도 외면했지만 사마리아인이 구해줬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이 기록이 공관복음서에서 유일하게 루가복음서에만 나온다.(예수 어릴 적 기록도) 사도 바울로와 루가가 서로 협력 관계였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들의 복음관이나 세계관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유다와 사마리아는 서로 적대적이었다. 그럼에도 예수가 비유로 사마리아를 든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선한 사마리안법이 여기서 나왔다. 오늘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갈등과 종교적 근본주의자들로 인한 전 세계적 문제로 볼 때 2,000년 전의 예수가 우리에게 묻는다. ‘네 이웃이 누구냐?’.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천 명을 먹이려면 떡가래에서 떡이 뽑아져 나오는 것처럼 떡이 늘어났다는 말인데, 필자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오병이어의 진정한 뜻은 나눌수록 풍요로워진다는 것이다. 군중들은, 예수를 만나려는 목적은 저마다 다르지만 먼 길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렇게 모인 사람들이 예수의 말씀을 듣고 지금껏 살아오면서 아무런 금심걱정 없이 마음껏 웃고 울어 본 적이 없을 만큼 행복했다. 그때 마침 저녁때가 되었으므로 자신이 먹으려고 싸온 음식을 모르는 사람들하고 나눠먹었다. ‘오병이어기쁨을 나누면 배가 되고 슬픔을 나누면 반이 된다는 것을 보여준 사례다. 이것이 기적이지 무엇이 기적이겠는가? “성서는 성서 속에서 성서로만 이해해야 한다.”

새벽 닭이 울다

해방절 전날 예수와 제자들의 최후의 만찬이 이루어진다. 제자들은 누가 더 큰 자리에 오를 것인가 서로 다툰다. 유다는 예수를 마지막까지 시험하고, 베드로는 감옥에 가거나 죽거나 주()와 함께 하겠다고 하자 예수는 새벽 닭이 울기 전 네가 나를 세 번 부인하리라.’ 하셨다. 예수가 무기력하게 체포되는 것을 본 베드로는 깊은 절망에 빠진다. 그러나 예수의 제자 중에 으뜸이 아니었던가? 이대로 도망칠 수가 없어 예수가 끌려간 대제관의 집에서 동태를 살피다 그를 알아 본 사람들이 이 사람도 예수와 함께 있었다.’고 세 번씩 말을 했어도 여보시오. 나는 그런 사람을 모르오.’ 세 번이나 부인했다. 그때 새벽 닭이 울었다. , 베드로여!

여인아 여인아

예수는, 자신이 못 박힐 십자가를 메고 골고타까지 가야 비로소 죽을 수 있다. 그가 메시아가 아니었기에 그 대가를 피로 치루어야 한다. 그를 따랐던 제자들은 다 도망갔지만 예수의 마지막은 마리아와 베로니카가 지켰다. 마리아는 어머니로서 강했고 어머니에게 자식은 기적 같은 존재니까 마땅했다. 베로니카는 예수 옷자락만 잡으면 병이 나을 거라는 믿음을 가진 여인이었다. 예수를 만나 변했고 홀로 섰다. 성서는 남성중심적이다. 아니 인류의 역사가 그렇다. 보편적이라는 뜻을 가진 가톨릭에서 여성은 기본적으로 사제가 될 수 없다. 21세기를 살면서 성서가 기록된 1세기에서 한 발짝도 더 나아가지 못했다. 예수를 두고 다 도망친 겁쟁이 남자들로 인해서 말이다.

사람을 낚는 어부

예수가 죽고 제자 둘이 엠마오로 가는 길에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게 된다(루가 24,13~35). ‘마침 그들 중 두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육십 사타디온 떨어진 엠마오라는 동네로 걸어가고 있었다.’ 나는 성서에서 문학적으로 가장 아름다운 장면으로 이 엠마오 가는 길을 꼽는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간 제자들. 그 겁쟁이 사도들에게 엠마오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한 권의 책이, 어느 한 사람과의 만남이 자신의 인생을 바꾸기도 한다. 제자들은 비로소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그들과 같이 먹고 마셨던 슬픈 눈을 가진 한 사내가 꿈꿨던 세상이 무엇인지 알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었다. 예수의 부활이 육신이 아닌 말씀의 부활로 말미암아.

네 은혜가 그것으로 족하다

바울로에 사도로서 예수의 복음을 땅끝까지 전파했다는 존귀함 존재지만, ‘재림은 예수의 핵심사상이 아님에도 바울로가 지나치게 강조하는 바람에 사람들이 일은 안하고 예수 재림만 부르짖는 원인을 제공하기도 했다. 교회는 지금도 예수 재림에 대한 긴박한 기대에 대한 좌절의 역사를 쓰고 있다. 그럼에도 사도 바울로의 위대함은 성직노동의 숭고함에 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바울로는 다마스커스에서 처음 예수를 만났을 때 강렬한 빛을 보며 눈이 멀었다가 떴는데, 그 이후로 눈이 좋지 않았다. 하여 전도여행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천막을 만들어야 했고 눈의 불편함이 가중되어 세 번에 걸쳐 기도했음에도 주()너는 이미 많이 받았다고 하셨다. 이것이 인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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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

  • 봉주2016-04-07 19:14

    댓글이 늦었지만…..
    인문학의 시야를 넓히는 양서로 생각됩니다…^^

출처: 2015-12-23 16:56 | 김집 | 예수 옷자락을 잡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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